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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그 격동 시절 속 청춘 (현룡운)
2020년 05월 11일 14시 51분  조회:531  추천:0  작성자: netizin-1

  (1)농민의 공수(工数)
 

  73년도 2월말부터 나와 졸업동기들인 새파란 청년남녀들은 집체호를 구성하고 정식으로 농촌인민공사 생산소대 사원(社员) 으로 되였다. 쉽게 말하면 소위 <하향지식청년>이라는 감투를 쓴 농촌농민이고 더 나가서 소궁둥이를 두두려야 할 촌민으로 된것다.

  옹근 동네에는 한족이란 한집도 없어 성인들은 한어말을 전혀 몰랐고 편지봉투의 한자 주소를 쓸때마다 지식청년들이랍시고 집체호를 찾어오군하는 동네,세개 자연툰에 달랑 대대 사무실에 전화 한 대,그게 유일한 정보망이였던 동네.

  혹간 영화를 이동봉사대가 상영할라치면 조선말<영화해설원> 이라는 기가 막히게 현장 해설하는 화술가가 있어 전반영화의 모든 남녀로소 배우들의 대사를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순 수 우리 조선말로 즉석 배음(配音)해야만이 영화내용을 알어보 는 조선족 마을이였다.

   밭갈이 철이 오자 당시로서 시내 공인가족들 집에서는 명절 이라야 맛이나 볼가말가 하는 찰떡을 잔뜩쳐서 밭갈이 소한테 먹이는것을 처음 보았고 소한테 우철을 신기는것도 보았다. 

  소를 형틀에 묶어 매고 소의 네 발바닥에 철판으로 만든 우철을 박는다.부림소한테 미끄럼 방지용이자 발바닥 보호용 철판을 대는데 쓰는 쇠못을 우철꼭지라고 불렀다. 소한테 신겨주는 구두같은 평면 철신이였다.

 촌의 대장간이 소수레와 소우철, 우철꼭지를 뽑는등등 일이 유일한 철공일이였다.

  송아지가 어느정도 커서 부림소로 자격을 가지자면 코를 가로 구멍뚫고 꼬뚜레를 꿰야 <코 꿴 쇄지>다. 

  소의 코을 꿰매고 수레나 발구를 끌기 위한 전 단계 련습인 송아지의 목을 틔운다면서 발구에 석마같은 무거운 걸 싣고 련 며칠간 "전문훈련"을 받어야 부림소,일군소로 승급하여 고삐를 끌고 다니게 된다. 

 송아지의 부림소로 승격이나 학생이 청년농민으로 어른이 되는 과정과 똑같은 것 같았다.

 어찌보면 우리는 송아지의 부림소에로 진화과정처럼 목을 틔 우고 코를 꿰거나 손발에 철판은 안박아도 장알이 박혀야 농군 이 될 것이라고 지방 청년형님들이 충고삼어 롱담조로 "너네도 저 쇄지 (송아지)들처럼 고생해야지" 한다.

  당시에는 소가 제1생산력이였기에 "애비없이는 살어도 소 없이는 못산다" 하는 시대, 그래서 생산대의 최고건물이 소사 양간 -- 우사(牛舍)였다. 전례없던<문화대혁명>시기인지라 거의 매달마다 터져나오는 정치구호와 계급투쟁만 선동하던 여러 매체들의 사설(社论)과 상급회의 정신이요, 무슨 동원 이요하는 등등 회의가 거의 매일 있던 시절이다.

 생산소대의 제일 큰 건물인 우사칸에 회의실용으로 붙여지은 회의실이 집합장소이자 활동실이였다.하루의 고된 전간로동에 지칠대로 지쳤지만 정치활동에 빠지면 안되였다.

 일에 지친 소들은 우사 량편에 서렬대로 줄지어 비스듬히 누워 서 그 퉁방울 눈을 꺼벅거리면서 한가하게 새김질을 하고 있고 농군들은 또 정치를 해야 하는 저녁이다. 소들은 정치가 필요없 고 여물만 잘 먹이면 된다. 사람은 정치가 꼭 필요했다.

  하향지식청년이 시골농촌에서 단련 받으면서 로동도 잘하고 정치활동에도 적극적이여야 그 표현에 따라 당지 “빈하중농” 사원들과 간부들의 공동평가와 추천을 받아야만이 농촌에서 <출세>할 수 있었다.

  지루한 회의 후엔 또 <대채평공>라고 하는 로동공수평의를 하는 로동평가회의가 있었다. 산서성 석양현의 대채대대의 발명 이라 해서 <대채평공>이라 하였는데 우리는 <대개평공>이라 고도 하였다. 얼굴도 붉힐 필요없이 대충대충 평하자는 뜻.

 

  농촌의 생산로동이라는 것은 일년내내 거의 한가지 일로 고정 된 작업이란게 없었다. 춘하추동에 밭고랑과 씨름하고 자연과의 박투에 고정된 일이라곤 없다만 그러한 여러종류의 일에 대한 평가만은 꼭 매일해서 그 공수(工数)만은 각자 기입해야 한다.

 도시공인들은 고정된 기술직종에 따른 고정작업분야가 있는데 이런면에서 보면 농민들이 로력현장에 대한 적응력이 공인들 보다는 더 강하다고 내가 공장직장 생활한 후에 생각해보았다. 그래도 당시에는<공인계급이 일체를 령도하는 계급이라고하였 는데...

 농촌이라 봄부터 토개량작업, 두엄 모으기작업, 농토 개량작업, 한전(旱田)의 조이홰지*부터 두 세벌기음,수전은 벼 모내기 부터 제초 작업, 돌피 뽑기작업,벼가을,거기에 또 담배 모내기, 담배뜯기,조이가을,콩가을,원경지감자농사,화목(불땜나무)하기, 묶걱질하기,곡식 탈곡하기 등등 4계절마다의 일은 여러 가지로 다른 일이였다.(*홰지-조를 심을 때 땅을 가르는 작업)

  농부의 일생은 무한이라, 소털 같이 많은 날에 일도 많기도 하였다.

  년말의 총결 때 일년동안 받은 각 자의 공수의 합계가 성적표 였다. 보통 근면하고 농사일에 미립이 있는 농군의 하루 표준 공수를 10부, 혹은1공수라고 하였다. 거기에 채 미치지 못한 일군의 보수는 7부, 8부, 9부라고 했는데 우리가 좀 모자라는 사람을 가리켜서 <팔부같은 자식>이라거나 < 쟤는 팔부여>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것 같다.

 그때 <꽃피는 마을>이란 영화에서 한 농장원에 일년에 600공 을 벌었다는 뚱뚱한 녀자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 지역에서도 좀 뚱뚱하고 인물이 차하지만 일을 뚝심있게 하는 녀자들을 가르켜  <600공처녀>라고 불렀다.

 땡 볕쬐이는 삼복철,사래긴 밭에서 하루동안 고된 김매기를 하 고서도 또 밭머리에 둘러 앉아서 하루로동 평공을 작업조별로 해야한다.

 로동태도, 숙련정도, 적극성 등등을 가지고 서로 평비를 하는데 정말로 골치가 아팠다. 그 평비에 근거하여 본인이 자기공수는 자기가 기록했다가 생산대 기공원이라는 <간부>가 따로 있어 매달 기공부를 서로 맞추어서 루락이 없도록 해야 한다.

 년말에가서 생산대 일년 총수입을 합계한 후, 일년 내의 전 생산대 남녀로소의 총공수를 합계하고 나누면 한 공수의 값이다.

 분홍(分红)이라는 일년분배 잔치 전에 일년 왕래명세를 공개 해서 공제한다.

 되놀이,개추렴에서 마셨던 술값도 싹싹 적어야 한다. 그걸 가르 켜, <개고기 문서> 혹은 <도투고기 문서> 라고도 했다.

농민들은 일요일라는게 없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라야 자동 휴일이여서 힘들 때면 비가 오길 얼마나 고대했던가.

지식청년의 선진일군 추천표준은 일도 잘해 공수도 잘 벌고 정치활동에서도 적극적이여야 했었다.

일년가서 년말에야만 “년봉”형식인 현금을 받는 시골에서 받 는 공수종류에는 일공(하루일 공수),계건제공수,탈리공수 혹은 반탈리공수,출장공수,의무로동공수,단독작업공수 등등 여러가지 명목이 있었다.(탈리-- 집체로동을 떠난다는 말)

청춘시절 6년을 그런 공수벌이를 하였었다.야들야들한 잔뼈를 굳히는 작업이였다. 

년간 300공내지 400공을 벌면 갑급이요, 200~300공은 을급, 100~ 200공이라면 병급으로 된다.

3, 4년정도 농사일을 하고 나중에 겨릿소를 몰고 밭갈이 가대 기를 잡고(집탑) 이라쨔쨔 하면서 밭갈이나 후치질,엎어갈이* (*감자밭 후치질 정도의 일종) 정도는 해야 진짜농군으로 된다.

그 정도의 일을 다 할수 있는 농군은300~400공을 받을수 있는 농군이다. 300~ 40공을 버는 총각들은 장가가기 좋은 대상 들이였다. 우리 지방의 말로는 "명주바지에 답싸리"붙듯 처녀 들의 청혼이 든단다.

그땐 당뇨병이란 용어도 없었고 고혈압이니 저혈압이니 3고 니하는 용어도 없었고 심지어 근시안경이나 돋보기를 끼는 로인 도 극히 적었다.

한공수에 따른 가치를 공치라고 하였는데 공치가 높은 생산 대나 지역이 잘 사는 동네였다. 기본상 공치가 최대의 정치가 아니였던가 생각한다. 

나는 힘든 일에 청년들 대장노릇 하다보니 년간 300공 아래 는 받은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식 청년이라서 약혼,청혼은 금지 구역이였다. 지금 같으면 안 그럴텐데. . .

 

(2)  지식청년의 고민 

 그때는 "계급투쟁을 기본으로,혁명을 틀어쥐고생산을 촉진한다 " 는 등등의 정치구호가 항상 귀등을 때릴 정도로 많았는데 처음 농촌에 내려가서 결심 발표도 여러번 하긴 하였는데 제일 큰 자아고민은 "본인은 한평생 농촌에 뿌리박고 혁명을 하겠 나이다" 라고 지극히 극단적인 선서문을 써서 올려야만 했고 여러가지 회의에서도 이러루 한 태도표시 한 후 고민이 깊었다.

 한 두해도 아니고 한 평생을 농촌에서 농민으로서 소궁둥이만 두드려야 한다는 그 정도 결심을 해야 뭔가 진보적인 지식청년 으로 락인이 찍히는데.

  한 두해 지나면서 깊은 고민만 고여가고 있었는데 하루는 덕화 공사의 당위 김서기(덕화공사의 최고령도)님이 우리 대대 에 시찰차로 왔다가 려관도 없는 동네라 그런대로 잠자리가 편 한 우리 집체호에 오셨다가 나의 침실에서 투숙하시게 되였다.

 그때 당시의 우리 눈에는 공사당위서기는 "태양"같이 높은 존재였다. 

  매일마다 이리저리 보내면서 일을 시키는 생산대 대장, 그 위에 대대주임이나 대대 당서기님, 또 그 윗분이 아닌가, 현, 시장 아래가 공사서기인데.

  잠자리에 누워서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의 부친과 친분 이 있었기에 용기내여 벌떡 일어나서 물어본 말이있다.

 "김서기님, 농촌에 영원히 뿌리박고 혁명하겠다구 했는데 그런 우리같은 적극분자는 정말 한뉘 농촌에서 남아 농사일만 해야 하구 군대도, 학교두, 공인으로도 못감둥?"

 "오, 네가 그런게 고민인 모양이구나", 높은 간부라서 인차 내말 뜻을 낌새를 챈것 같었다.

"야, 그래 농촌에 단련내려와서 발전하겠다는 늠들이 그 정도의 결심발표는 해야 조직에서도 저 늠이 결심이 괜찮다고 인정하구 밀어줄게 아니야.그게 조직의 의무야, 그렇다구 앞길이 창창한 놈들을 전부 이 농촌에 뿌리박게 하구 어데두 못가게 하는 정책 은 없어. 

  전쟁판에서도 결사대가 다 죽어버리라는게 아니고 그런 정신 으로 임하라는 뜻이 아니겠어, 다 죽으면 전투는 누가 하구. . . "

 아하, 그런 뜻이였구나, 피끓어 번져지는 내 가슴에 와닿는 가장, 가장 깊은 훈시, 눈앞이 훤해졌고 머리에 부담이 훅 날려 갔다.

 그 이튿날 아침, 식사후 어깨를 펴고 김서기님을 모시고 대대 전간에 이리저리 모시고 다녔다. 전야를 둘러보시는 김서기님이 그렇게 자상하고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개인의 전도와 리상이 당시 정치풍도에 어울리지 못하고 언행 이 불일치하지 않는가 하는 깊은 우려에 빠진 젊은이의 머리속 고민을 하루밤새 대화로 훨훨 풀러 주셨다. 꽉 막힌 장기(象棋) 의 수를 신의 한 훈수로 풀어주듯이.

그때 그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조언해주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내 인생의 첫 정치적 고민을 풀어준 첫 은인이였다.

썩 몇 년지난 후, 내가 화룡에서 자동차정비회사 사장할 때 이미 현급간부로 계신 그 분을 우연한 장소에서 딱 한번 만나 인사드리고 한잔 올리면서“김서기님,그때 그 말씀이 정말고마 웠습니다”하니 “다, 정치가 문제야, 펀펀이 공부할 놈들을 시골 에 내쫓고, 니도 잘 성장해줘 고맙다, 이제부터 잘 해봐, 뿌리는 어디에 가도 박고 살어야 산다, 뿌리가 마르면 생물이 죽지. 옳 지?” 하시면서 내 등을 다독여주시던 하늘나라에 가신 그 분이 정말 그립다.

 그리고 고마웠던 분이시다.그때 그시절 정치적 기후에 정치 적인 솔직한 멘토(mentor)가 희소한 세월에 젊은 나한테는 첫 멘토였다.

 

(3)   일등 이라?

1975년 마가을, 일년에 한 번씩 진행하는 화룡현덕화공사,  지금의 남평鎭 운동대회는 두만강가 옆 남평 중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말이 公社운동대회였지 분위기는 지금의 우리로 말하면 올림 픽경기 못지 않는 체육행사였다. 11개 大隊(지금의 村)의 시골 운동 건장들이 치고, 박고, 결투를 진행하는 경기대회였다.

내가 하향내려간 룡연대대는 운동실력이 강하고 농사도 잘되 고 돈이 많은 부촌인지라 연길, 화룡등 연변을 훝어가면서 운동 특기선수를 영입하여 집체호에 끌어왔다. 마치 지금의 이적 선수를 영입하듯이…….

3일간 운동대회와 문예경연도 하는데 마지막 날 오후는 축구 결승결기가 펼쳐졌다.

결승경기날, 가을비는 내리고 해는 저물고 분위기는 살벌한 룡연대대와 남평대대간 축구결승전은 두 마리 황소 싸움같었다.

농촌 운동대회는 언제나 점잖게 끝을 본적이 없었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전반전에 비긴 두 팀, 후반전에 패널킥 시비로 대판 싸움이 벌어졌는데 변심(邊審)이란 자가 오프사이드(offside)(旗)를 쳐들 었는데 주심(主審)은 변심이 살짝 들었다 급히 내리운 절충적인 모호한 동작을 보질 못하고 그냥 경기를 진행하다 보니 결국 꼴로 판정이 난 판. 

전반전에도 상대편 핸들링(handling)을 불지 않은지라 경기장 은 서로 주심과 으렁으렁하는데. 

룡연과 남평은 운동회 력사적으로 앙숙인지라 또 싸움판에 시비소리에 거기에 각 大隊 대대장(지금의 촌장)들이 가세하게 되여 그야말로 말릴수록 더 아우성이 터지는 운동장이였다. 남평이라는 곳은 공사 소재지로서 텃세가 좀 있었다.

결국 심판이라는 중학교 체육선생이 욕설과 주먹이 오가는 야유속에 호르래기 던지고 강둑을 따라 달아나자 심판대행이 들어왔는데두 량팀은 불복으로 으르렁. (원래 심판대행은 불가)

 찬가을비는 내리고,해는지고,나중에 절대권세자인 주석단(主席 團)의 주임,서기어른들의 결재(決裁)로 운동대회질서 파괴罪로 두 팀 다 2등이라는 불명예를 가지는것으로 운동회는 막을 내리고 서로 손사래를 쳐가면서 명년에 다시보쟈 하고 으르렁 거리고서는 우리 룡연팀은 무한궤도 뜨락또르를 전용 운수기처 럼 타고 흥분한 상태에서 툴툴거리면서 30리 귀촌길에 올랐다.

대대당(大隊黨)서기들도 서로 주먹 휘두르며 야단치다가 결국 거룩한 공사 당서기의 질책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이야기의 본론으로 들어가면 그때 세월은 一等이던 2等이던 3等이던 전부 똑같은 거울(鏡子50CM* 1M정도)에다 榮獲 1975년 德化公社 運動大會 축구 一, 二, 三等 이라고 뼁끼 (페인트)칠을 하고는 금박(金薄)가루를 뿌려 하사하면 끝이였다.

 

당시 민병련장(民兵連長)이자 인솔자인 나는 운동선수들을 다독여 뜨락또르에 태워 마을로 오는데 우리 팀의 중앙방어수로 유명한 박 아무개란 자가 이번 대회에 받은 狀章인 거울을 부둥 켜 안고 싱글벙글 하는것이였다.

“너 임마, 비기구서도 무슨 좋은 일이라구 싱글벙글이야”

“야, 그래두 상장을 봐, 一等 이잖어…하하하”

하느님 맙시사, 이 자식이 글쎄 둘 二 字의 가로금 하나를 저꺽 손칼로 긁어버렸다. 둘二가 하나 一 로 변한게다.

마을로 돌아가면 개선장군들처럼 대대 사무실에 번듯히 걸어 야 할 거울, 또 뒤풀이 행사때 정중히 대대 간부어른들한테 “본팀은 죽울 내기로 싸웠지만 2등의 영예만을 가져왔습니다” 하고 상납해야 하는데 글쎄 글자 획하나 가로채 빼서 일등으로 둔갑한 저 거울 상장을 어히하리요, 뼁끼도 없고 금박도 없는데 다시 더 써넣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원래는 공동2등인데 저눔 자식이 가로금 한 획 빼먹었소이다 할 수도 없고, 운동대회서 난리소동 소문은 이미 날대루 다 난 판국인데…….

 

더 기막힌것은 공사지도부 모함이라는 중죄론까지 나온다는데 당시 총인솔자인 내가 그 한劃때문에 덤터기를 쓴 판국이였다.

영문 모르는 일부 대대 간부님들은 송아지까지 잡아놓구 기다 리던 차 내가 상장을 바치자 하시는 말씀 ”그래 잘했다 축구야 당연히 우리 룡연 대대가 일등이지…….

 

그런게 몇 일후에 그 어르신들이 공사마을 (남평촌)출장 갔다와서 나를 다잡어 부르더니 “너네 임마들아, 무슨 판이야… 남평대대(공사마을소재지)사무실에 가보니 거기두 축구 一等라고 번듯히 걸려있더라니까??

후에 알고 보니 남평대대의 웬 불복자 하향지식청년이라는 늠들이 역시 둘二에서 한劃을 빼낸것.

제길할, 公社當書記님, 진작에 그럼 倂列 一等이라고 하시지.

 

 1等字를 만드는 기교는 그 후날부터는 누구의 묘안인지 冠軍, 亞軍, 季軍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뺄 劃이 없었다.

壹等, 第一名 優勝팀,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이 올림픽에서 나오는데 그때 그 시절엔 금, 은, 동 귀하였지. . ㅎㅎ

 

 (4)손시계 임대

시계란?

손 시계, 사발 시계(탁상시계)벽 걸이시계, 탑 시계, 전자 시계, 회중시계 등등 여러 가지가 많다. 거기에다 날짜 나오는 시계, 라이터 시계. . . . . . . .

 약속을 지키는데도 시계, 일 하는데도 시계, 밥 먹는데도 시계,잠 자는데도 시계… 하여간 시계의 공능은 지금 시대에 와서는 여러가지 기능이 있다.

그런데 예전에는(70년대에는)

“올 해 죽게 벌어 시계를 사야지”, “저 총각 시계를 찼다(있다)”, “그 집에 시계가 있다”, “시계 있는 집”, “결혼 부조에 벽시계가 덩그러니” … 

“시계를 찬 걸루 보아서는 똑똑한 것 같다”

  시계 없는 가정에서 시계 있는 집에 코흘리개를 시켜서는 "야, 아무개네 집에 가서 지금 몇 시인가를 물어보구 오너라" 하면 " 이집 시계 몇 십둥?" 하고 물어 올 때가 많았다. (자기네는 시계 도 없으면서?)

 

 1974년 양력설(원단)이 지나서 내가 하향지식청년으로 처음 년말 소득분배총결을 맞었다. 년말 분홍이라고 용어를 썼다.

 그때, 농촌 생산대 분홍(수익분배)라면 굉장히 복잡하고 재미도 있었다.

매년 일년 수익분배를 하고 현금 분배 할 때면 끝나고 돼지나 소를 잡고 집집의 인원수에 따라 육류 분배를 하는데는 저울이 아니라 기지치기*를 하였다. (*싸리나무 꼬챙이에 고기를 적절 하게 뼉다구랑 함께 꿰쳐 나누는 원시적 육류분배 계량 단위)

 온 동네가 축제의 분위기로 들쑥 거리고 공급판매합작사 (지금 의 매점)문지방돌이는 불이 날 지경이다.

농촌에 내려간 첫 해는 국가의 식량을 타먹게 되였다. 그리고 농촌 안치비(安家落戶(安置費)라는게 국가에서 주었기에 첫 해만 120원씩 지원하여 주는 “우대 정책”이 있었다. 그러니깐 첫 해에는 생산대 측과는 왕래(거래 발생)가 거의 없어 일만 잘하 면 목돈을 쥘 수 있었다. 그것도 좋은 고장에 가야 그렇구…

--지금 젊은이들을 다시 한번 한 해에 인민페120원을 꿍져 주고 농촌에 가서 농사를 시켜보면 어떤 진풍경들이 연출 될가 한다.

 

생산대 별로 공치(工値)를 계산하다보니 자연히 경쟁도 심하 였다. 대략 계산방법은 전체 생산대 모든 남녀로소 사원들의 일한 공수(工數)로 전부 수입을 제하고 다음 공적금으로 이듬해 쓸 생산비용을 떼내고 보조금 같은걸 떼낸후 한 工値 얼마 라는게 나오는데 1974년 우리 생산대는 한 工値가 2원90전 이나 되여 전 화룡현에서 최고였다고 할수 있었다.

당시 어떤 시골에서는 하루 工値가 한장 우표값인 8전도 안되는 고장도 있었다.

 

딸 부자 집들은 음주파티 참가 往來가 적어 타는 돈이 좀 많고 잔 식솔이 많은 세대주들이거나 지병으로 환자가 있는 집은 비용을 공제하고 나면 별로 탈 돈은 없었다.

참 보기가 궁색하였다. 생산대 왕래 내역서를 보면 그 내용이 다 적혀 있다.

하여간 그 해 나는 2월에 내려간 후로 열심히 시키는 일만 하고 신체가 그 고장 말대루라면 “무릎에 피가 한 동이씩 고인놈 들인지라” 좋아서 거의 만출근하다싶이 열심히 일하고 나니 전 집체호 16명중 거의 최고수입을 올리게 되였다.

년말에 400여원이란 거금을 현금으로 타게 되였다. 물론 이듬 해 먹을 자기 식량값, 감자, 배추, 무우 같은 분배하는 채소값 이랑, 기름 값은 제하고서였다.

1973년의 인민페 480원이라면 시내 일반 살림집 한, 두채 를 살수 있는 자금이였고 그때 우리 동네 중학교 교장의 월급 이 45 원였다. 순수입으로 거의 일년 교장월급을 타게 된것 이였다.

그런 거금을 나는 난생 처음으로 쥐여 보았고 그 해 양력설에 화룡에 계시는 아버지한테 한 푼도 안남기고 전부 인편에 보내 드렸다. 이 큰 아들이 번 돈이랍시고.

그런데 아버님은 평생 이 맏아들이 처음 억척스레 벌어보낸 돈인지라 고민중에 글쎄 180원이나 주고 나한테 일본제 세이꼬 (精工牌)손목시계를 덜렁 사서 보내주시는게 아니겠는가?

혹여 이 아들한테 품위를 심어 주시는라 그랬는지 몰라도 전 화룡현에 해마다 두 개정도만 년말이면 귀품으로 내려 오는 백화점 일본제 손목시계 구입표(당시는 표가 있어야 구입 가능) 를 지인통해 얻었다고 한다.

나는 시계라는것을 그때 처음 손목에 차고 다니였는데 그 일 본제 세이꼬 시계 때문에 많은 일화를 만들었다.

생산대장은 일 안배를 할 때면 한 무리 일군들에는 반드시 시계를 찬 사람을 한 명씩 특파하여 시간 알림이로 고정안배를 하였다.

 

보통 전간에 가서 일을 할 때면 배고파나면 점심이요, 해가 서산에 넘어가면 저녁이였다. 한 여름철이면 두만강 건너편 조선 측 공로에서 茂山行으로 올라가는 上向뻐스가 보얀 먼지를 일쿠면서 올라가면 거의 점심 때인지라 배고프거나 힘들 때면 우리네 젊은놈들은 조선쪽 언덕을 눈이 빠지게 서로 목 빼들고 살피다가도 조선측의 뻐스가 올라가면 “에라, 점심먹으러 간다” 고 집체호로 줄행랑을 놓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한 번은 가을철 잎담배 건조실 일로 빠쁜 와중에 우리 생산대에 총각인 찬길이란 당지 청년이 아침전에 집체호에 날 보자구 찾아왔다.

자기네 집에서 초두부(순두부)를 하였는데 자꾸 가자구 하기에 이상하다 하면서 따라갔다. 나 한테 소수레를 모는 것부터 배워준 소위 빈하중농 청년대표였다.

 

당시는 중국의 농촌은 계급사회 성분을 획분하여 지주, 부농, 중농, 하중농, 빈농, 고농으로 인간사회의 출신 성분을 분류하여 딱지처럼 붙여놓고 젊은 청년들의 전도도 그것으로 가름하여 <혁명후계자>로 뽑기도 하였다.

 

지금말하면 해방 전에 거지처럼 살었거나 빈 털털이나 고농 (顧農)이면 혁명에서 가장 깨끗한 출신이고 잘 사는 지주, 부농 자녀나 그 당사자들은 거의가 혁명대상딱지가 이마에 붙어 있는 것이였다.

 

그래서 우리같은 하향지식청년은 농촌 빈,하중농(무산계급에 상당)의 재교육을 받으라는것이 모택동 주석님의 지시였다.

말이 빈하중농대표지 빈하중농 자제라 해야겠다. 우리보다 조금 년상이였으나 맨날 “야, 이 빈하중농의 재교육 잘 받어야 해” 하면서 우리를 데리구 일을 하면서 자상히 배워주던 무던한 형 이였다.

 항시 헤헤하고 그 힘든 소 외양강 언 소똥 두엄끄기 작업 이던, 언 통나무장작패기 같은 일, 돌을 까고, 목도를 하는 일을 해도 항상 힘이 넘치는지 웃기도 잘하는 하루에 담배 두 세쌈 지을 태우는 왕골초 담배지골인 빈하중농 자제였다. 사람이 진국이였다.

 

영문도 모르고 형을 따라 따라가서 음식솜씨 좋은 그 형의 전라도 고향인 어머님이 해준 따끈하고 핫들핫들한 초두부에 입쌀에 감자와 기장이 적당히 섞인 밥한 끼 푸짐히 하고 나서야 그 형이 하는 말이 참 머쓱하였다.

“야, 룡운아, 내가 사실 말이지, 이건 비밀인데 헤헤, 래일 내가 상화 (우리 아래 동네)로 말 뗄러 간다(선 보러 간다는 뜻), 너 그 손목시계를 좀 빌리렴, 군대 모자와 옷은 저 옆집 군대 갔다온 영호한테서 빌렸다, 단 이건 절대 비밀이야, 알었지?”

그때 제대군인 복장에 데트론 군대모자(的确良帽), 군용혁대를 차면 다 지금의 최고의 행차용 제복이였다.

원래 마음씨 곱고 평소에도 남과는 얼굴 한번 붉힐줄 모르는 위인이 내 한테서 일본제 세이꼬표 손목시계를 림시 임대하려고 초두부(순두부)초대 작전을 어머님과 이틀전부터 짠 것이다.

초두부 먹은 놈이 방법이 없었다.

나 한테서는 가장 귀중한 손목시계를 자의반, 타의반의 손목 에서 벗어 넘겨주면서 한 말이 지금 생각하면 피식하고 웃음이 나올지경이다.

“형, 이 시계 내 조만에 (웬간해서는) 누구도 빌려 안주는데 첫째,어디라도 오리우면(긁힌 자리) 나면 안돼요, 다음,세수랑 할 땐 꼭 벗어 놓고서 하고 잘 때면 손수건에 감아서 베개 밑에 잘 감추구 자야 돼요” 등등.

 “알었다, 알었서…”

찬길이 형은 옆 집 군대 갔다온 친구의 색바랜 제대 군인의 군관복을 입구서 군모를 빠딱하게 쓰고는 손목시계를 차구서 벙어리 례장받은 것처럼 기뻐하면서 타동네 색시 맞선 행차 출동준비 완료

초두부 두 사발 얻어 먹고 세이꼬 시계를 임대하여 준 셈이다. 귀하디 귀한 내 손시계를 벋어빌려 준 그때 그 순간은 손목이 허전했었다. 저형이 술 먹고 흥분돼서 혹시 잃어 먹기나 하면? 하고 부질 없는 생각두 했고.

 아침식사 후 건조실이라고 부르는 당시 농촌의 최고층 건물 에 숱한 일군들이 모여 일하는데 마을 동구를 향해 입이 함박만 해서 찬길이 형이 나오는데 마을 처녀 총각들이 앞다투어 일은 안하구 어딜 가냐 하고 시샘조로 탐문하니 그저 헤헤 할 뿐이 였다.

찬길이 형은 몸이 좀 왜소해서 빌어입은 군복이 좀 컸으나 그래도 좋다구 펄럭이면서 자기 이모를 앞세우고 어깨를 으쓱 거리면서 가는 모습, 왼손 잡이여서 오른쪽 손목에 나한테서 <임대>한 손시계를 차고 씩씩하게 다섯 발자국, 열 발자국마다 걷다가도 자꾸 오른손을 휘익 휘둘러 올렸다 다시 내려 시계만 보는 행동을 하면서 우쭐우쭐하고 새 색시사냥 간답시고 가던 그 형의 뒤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동료 처녀총각들은 모두들 의아해서 휘휘한다, ”언제 저 자식 손 시계를 샀지?”……

갑돌이가 맞선보러 간다니 동네 갑순이,영순이들이 싱숭 생숭 하는 판이요, 여늬 갑돌이들도 둥둥 마음이 떠있는게 분명 했다.

며칠후, 그 형의 집으로 돌아왔는데 상화 촌의 매파역을 한 그 형의 이모(원 고향이 상화촌인 약혼 참모)가 와서 하는 말이 더 걸작이다. 생산대 담배 건조실에 숱한 사람들이 일하는데 옛말 거리가 없어 궁금한 판에 그 집 이모가 나왔는데

“찬길이 혼사 어히 됐슈?”

“말을 뗐소?”

“오호, 그 사돈 될 바깥량반 우리 상화촌에서 호랑인데, 에이 그, 우리 찬길을 보더니 입이 귀에 가붙더라니까.”

“사위감이 시계를 찬 걸 보니 꽤나 똑똑하겠다고 그러던데 아이고, 호호, 잔치는 금년 부농(분홍)하문 하자구 하잽둥. 새기(색시)두 시계를 이제 찰게 꾸마…. 그 집두 잘 사는데… 호 호호. ”

결국을 시간을 맞추는게, 알리는게 목적인 시계를 찬 사람이 시계때문에 성깔머리가 호랑이 같다는 장인될 사람한테서 

“똑똑해, 똑똑해 허허, 우리사위 될사람, 

일본제 세이꼬 시계를 찬 걸보니 똑똑해, 허허”하면서 걸직한 막걸이 대접하더란다.

 게다가 동네방네 50리 이내엔 어디도 없는 일본제 세이꼬 아닌가….

그 때 상화촌은 정치는 대단히 잘 하는 동네였는데 룡연에 비해서는 구차했다. 아마도 그런 손목시계를 차고 있는 사람이 없었을 가능성 때문에 찬길 형의 혼사도 잘 된게 아닌가 하고.

 

물론 그 형은 후날 마음 좋은 상화색시와 결혼해서 잘 살구 애들도 인제 다 커서 장가간지도 오라단다. 하기야 그 때문에 내 시계는 찬길 형의 결혼 잔치날, 삼일 사돈인사때까지도 사돈 들 눈치 때문에 또 임대하여 드려야 했다.

전기도 없고 라디오도 없는 골연으로 감자 캐러 갈 때도 난 그 시계 때문 차출되여 오지로 파견되였다.

그 후 학교에서 교직에 있을 때도 내 시계가 제일 명표라서 사도존엄(師徒尊嚴)정신이 무지하게 강한 교장님도 가끔 내 손목시계를 빌어 차고 피식 웃으며서 행차할 때도 있었다.

그 땐 아갸들 손목에도 잉크로 손시계를 그려 줄 때도 있었다. 지금 애기들 손목에 손시계를 그려주면 젊은 엄마들이 뭐라 할가?

하여간 흘러간 세월에 옛말도 많지만 시계, 자전거,라디오, TV, 재봉침, 전기밥솥, 전화기, 냉장고, 휴대전화기, 컴퓨터 등 가전 제품들 때문에 우리 생활의 일화들이 많은것만 사실이 였다.

이게 40여년전에 내가 내려가 땅을 뚜지던 덕화룡연 골안 에서 있었던 시계의 일화이다. 하긴 요즘 그런 시계도 없어졌다, 실시간으로 언제 어디서나 시간을 알수 있으니 몇 천불 주고 소장용으로 로렌스 시계 같을 걸 찬 사람이 어찌 보면 덜 똑똑 해 보일 때도 있다.

저마다 스마트 모바일(손전화)를 다 차고 다니는데 전부 똑똑 해진 세월이 아닌것 같아 고개를 개우뚱하고 가끔 생각 한다.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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